마태복음 19장에는 복잡한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간단하게 내용구조를 보면,
1절-12절: 이혼과 결혼에 대한 내용 13절-15절: 다시 어린아이들에 대한 예수님 말씀 16절-22절: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 23절-30절: 부자 청년 이야기에 대한 코멘트리 이렇게 구별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자비없는 종에 대한 비유를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서 요단강을 건넌후 유대지경에서 무리들을 향해 가르치신 내용들입니다. (1절-2절) 갈릴리를 떠났다는 것은 고향을 떠나셨다는 말입니다. 익숙한 장소가 아닌 익숙하지 않은 장소로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지경이란 표현도 대부분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율법에 익숙한 자들을 향해 본격적으로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복음서의 평행본문에서 마가복음 10장에도 똑같이 요단강을 건너서 유대지경에 이르렀을때, 이혼와 결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선, 1절-12절의 이혼과 결혼에 대한 내용은, 모세의 약속과는 다른 예수님의 의견을 보여줍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단순히 이혼에 대한 율법적 해석으로 보일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 남성중심으로 비롯되는 이혼에 대한 경고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했던 로마의 법에서는 이혼에 대해 여성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율법에서는 여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혼의 주체가 될 수 없고, 대상이 될뿐입니다. 그래서 이혼을 "버린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7절). 모세의 율법은 남성중심적 부부관계를 형성하게 했습니다. 일방적이고, 여성에 대한 배려가 없는 "죄성"이 가득한 행위를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것입니다. 이런 정황에 로마의 법까지 섞이게 되었습니다. 결혼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없이 이혼에 대한 이해가 바뀌면서 적잖은 혼란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적한것은 우선, 남성중심적 이혼행위에 대한 경고이고, 두번째는 정확한 결혼에 대한 이해없는 결혼생활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런 가르침 끝에 제자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장가 들지 않는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반응은 예수님이 의도한 반응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적극적으로 상상해보면, 예수님은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깊은 배려와 함부로 하는 것이 변화되는 것을 기대했을텐데, 오히려 결혼을 부정하는 쪽으로 제자들이 해석한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분명히 타고나거나, 혹은 특별한 종교적 이유로는 가능하겠지만, 모든 남성들이 그럴수 없음을 이야기하십니다. (11절-12절) 그러니, 다시 남성들의 일방적인 이혼행위에 대한 경고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마칠때즈음,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님의 안수받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꾸짖자, 예수님께서 다시한번 천국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앞서 여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아이들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경은 여성과 아이들을 분명한 사회적 약자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율법을 넘어서 보호하고 배려해야할 대상입니다. 더불어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 그래야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린이들의 순수함이 신앙생활에 중요하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은 믿음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경험이 많으면 노련해지지만, 그만큼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아집니다. 믿음이 클 수 없습니다. 이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물어왔습니다. "무슨 선한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까요?" 이 사람이 관심은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 사람은 자신이 궁금한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예수께 물어온것입니다. "영생"의 관심은 영적인 관심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계명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계명을 잘지켰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를 위해 종교적 행위를 실천하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20절에서 비로소 이 사람이 청년임을 밝힙니다. 그러면서, 모든 계명을 다 지켰는데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영생을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데, 지금 더 필요한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인데, 지금은 청년이라고 밝힌것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고민은 청년에 맞지 않은 질문입니다. 젊은 청년이 꿈꾸는 것은 청년이후의 삶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어느정도 자리를 잡으면, 결혼을 하면, 직장을 가지면, 가르침을 끝내면 등등, 청년으로서의 마땅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질문은 "영생"입니다. 종교적 심성이 깊어서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청년에게 맞는 종교적 심성은 아닙니다. 차라리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라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떤 계획으로 가지고 살아야합니까? 라는 질문이 어울릴 수 있습니다. 21절에 예수님의 이런 청년의 상태를 간파하셨습니다. "온전하고자 한다면,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 청년은 재물은 많은 부자청년이었습니다. 많은 재물로, 이 청년이 갖게된 영적인 질문이 "영생"에 너무 일찍 다다른것입니다. "삶의 성취에 대한 고민" 혹은 평범하게 어떤 배움 교육, 직업에 대한 고민을 할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충분히 가졌고, 충분히 누릴수 있으니, 너무빨리 영생에 관심을 갖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에게 예수님이, "모든 소유를 팔아야" 영생을 완전하게 이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청년의 모습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종교적 질문, 즉 신앙적 질문이 필요합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큰 믿음 갖는것도 아니고, 평생 교회밥을 먹는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그 신앙이 성숙한것도 아니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믿음이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질문"을 통해 이말은 고민과 고뇌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청년이 "영생"을 질문했지만, 그 질문속에는 한방에 모든것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발견되어 집니다. 이에 예수님이 이 부자청년의 약점인 물질을 이야기하신것입니다. "소유를 팔아" 이 말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를 팔아야 온전한 하나님의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소중함은 믿음보다, 신앙보다,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마 한두개쯤은 있을 겁니다. 23절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은 이 청년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부자가 한방에 어떤 집을 사거나 건물을 살 수 는 있지만, 한방에 구원(영생)을 얻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한방에 익숙한 청년에게 전하는 근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이 놀랍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만 그런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걱정하게 한 말씀선포입니다. 부자가 천국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니 이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불가능은 어디서 오는가 하면, "내 능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하시면" 구원을 이를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6절) 그러니, 물질에 대한 이야기로 오해하지 마시고, 내 힘, 내 능력이면 모든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근거없는 자신감을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내능력, 내힘을 버리는 순간, 내 우선순위를 바뀌는 순간 우리에게 허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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