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에 틈새를 통해 자주 세상을 본것은 군대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구치소에서 군생활을 하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던 그시절, 주로 근무하는 곳이 통문, 감시대, 어느철문앞 그정도였으니 늘 틈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사람을 봐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날 전직 대통령이 구치소에 들어온다고 한날, 구치소 직원들이 분주히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통문 앞에서 지켜본적이 있습니다. 한 사무실을 비워서 침대를 만들고, 나름 격을 갖추는 모습에 죄를 지어도 어떤 삶을 살고 들어오냐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모두가 수인번호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안에도 힘있는자와 아무힘 없는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문득, 죽음이외엔 이 구별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왕국의 요시야왕은 구약성경에서 종교개혁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예루살렘 성전 이외에 지방에 다른 성전이 만연했을때, 요시야왕이 지방의 성전을 문닫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만 인정하는 정책을 폅니다. 아무래도 지방에 성전이 있다보면, 물질적이든 종교적이든 분산되게 되는데, 예루살렘 성전, 곧 중앙성전만 인정하게 되면 물질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중앙으로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노렸을 수 있겠죠. 그런중에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다 성전 천장에서 신명기서를 발견합니다. 신명기서의 기록을 보니, 지금 남유다의 신앙상태는 엉망진창입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순종이 그들의 삶을 쥐고 있는 상황이니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요시야의 이런 이야기는 열왕기하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변화는 포로기 이후에 벌어집니다. 포로기 이후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무엇이 문제였나?"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도 잃어버리고, 영원할것이라던 왕국도 망했습니다. 다시 나라를 재건하는데, 이 신학적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나라를 재건하는데, 사용된 것인 바로 신명기 서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열왕기상하를 신명기 역사서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신명기서를 기준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기록한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시야왕은 훌륭한 왕입니다. 신명기서를 기준으로 보면, 종교개혁을 실행한 왕은 훌륭한 왕이고, 성전을 건축한 다윗과 솔로몬은 당연히 좋은 왕으로 그려집니다. 신명기서를 읽다보면, 바로 이 신명기적 관점에서 구약을 읽어볼 기회를 갖게됩니다. 물론 우리들이 이미 해석된 역사를 읽게되지만, 그안에서 왜 이런 관점,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알수 있습니다. "순종"이 반복되어 강조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순종"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모세가 명령하고, 설교한 내용들이 가나안 정착이후에 여러가지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망각이었습니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긴 한데,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본질이 아닌 비 본질적인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중요한것은 잊어버리고, 형식만 남는 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어제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이었습니다. 마틴루터의 주장은 늘 교회는 개혁을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합니다. 이 개혁이라는 것이 거창하지 않습니다. 본질에서 벗어난것인지 아닌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불어 변화를 추구(transformation)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개혁의 중요한 화두입니다. 아시겠지만, 이 문장은 늘 반복되는 것입니다.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면, 마치 신명기서라는 잣대로 역사를 평가했던것처럼 우리들의 신앙과 교회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요즘, 교회는 목사는 기독교인은 이런 잣대에 다시 재단되어야할 상황에 놓인것 같습니다. 그만큼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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