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늘 본문에는 세례요한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아무래도 감옥안에 있던 세례요한은 궁금한게 많았을 것입니다. 또한 실재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교회안에 흡수되면서 몇가지 정리되어야할 것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첫번째는 세례요한의 위치 그리고 세례요한의 사역의 의미입니다. 세례요한의 위치는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역할은 예수님을 미리 예비한 선지자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극명한 차이는 세례요한 광야에서 석청과 메뚜기로 연명했던 것을 떠올리며, 지금 아무것도 먹지 않는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19) 포도주를 즐기는 세리와 죄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먹기를 탐한다는 그리고 포도주를 즐긴다는 것은 세례요한과 차이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는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일이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다순히 식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대표합니다.
16절에서 17절은 이 세대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이 이어집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늘상 예언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처럼, 세례요한의 외침은 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연결해서 20절에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마을이 회개하지 않음을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21절에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20절에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쪽의 마을인데,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셨는데도, 회개하지 않는자들이 많았던 놀라운(?!)곳을 지적하십니다. 이것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는 자들이 가장 많은 곳과도 같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두로와 시돈이 등장합니다. 두로와 시돈은 처음에 가나안정착때는 이스라엘의 땅이었지만, 솔로몬이 궁전과 성전을 짓기위해 필요한 백향목을 사들이기 위해 팔았던 도시입니다. 그러니 버림받았다는 느낌으로 가늑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이 차라리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과 은혜에 대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역사하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밭이 문제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은 스스로를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표현하십니다.(19절) 이 표현은 의도적으로 신적인 능력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입으셨다는 것은 케노시스 곧,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낮춰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입니다. 인자라는 표현은 한단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 곧, 낮아지심에 대한 강조의 표현입니다. 28절에서 끝까지는 유명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맥락상,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를 암송하지만, 이전의 말씀들이 가볍게 여겨집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타락과 회개의 절심함이 담겨있는 문장입니다. 11장의 결론으로 이해한다면, 앞에 있는 모든 행위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부르짖어도 꼼짝않던 도시들을 기억하며, 세례요한의 수고와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무거운짐 이 모든것을 예수님이 받아주십니다. 오늘 그림은 빈센트 반고흐의 석탄을 나르는 여자광부들의 무겁게 진 석탄 무더기를 표현한 그림입니다. 끊임없는 노력에도 열매가 많지 않은 것에 낙심하지 마시고, 주님께 와서 쉼을 얻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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