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실천입니다.
9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10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기도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는 "사랑"이 지식과 통찰력으로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은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그저 이해하고, 받아주고, 모든 것을 용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바울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엄격한 실천과 기준이 있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사랑은 지식과 통찰력으로 풍성해져서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분별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무조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선입관입니다. 이 사랑을 통한 분별을 통해 마지막때까지 순결하고 흠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더나아가 11절에서는 "의의 열매" 마침내 이루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교회는 사랑이 넘쳐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는 교회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받아들임, 용납함을 우선하기 전에, 엄격한 분별이 우선되어야합니다. 옳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것을 용납이라는 이름으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끊임없이 옳지 않은 것을 포기 하지 않고 지식과 통찰력을 통해 분별할 수 있도록 "사랑하라"는 것에는 동의하는 것이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착각하면 안됩니다. 성도간에 이런 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해야합니다. 한사람은 끊임없이 요구하고 한사람은 끊임없이 받아들이면 관계가 정상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누군가 하나는 아프게 됩니다. 일방적으로 목회자가 다 받아주고 이해하는 것도 순간은 평안해 보이지만, 결국 아프고 상처로 성숙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공동체가 생명력이 있다는 말은, "사랑"이 살아서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인 지식과 통찰력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분별입니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가장 엄격한 심판은 무관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심판입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문제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엄격한 심판에 들어와 있을지 모릅니다. 흔들리고 아프고, 불편하다면 끊임없이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는 내가 싫은 형태로 찾아듭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바로 이런 이해입니다. 불편한 형태로 찾아온 예수님의 고난이 결국, 생명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랑은 결코,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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