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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1/12/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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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nore Dyck and Pat van Nes, on the Beatitudes, Mennonite Brethren Church (팔복 배너)
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께서 산위에 오르시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예수님은 모세의 유형으로 그릴려고 노력했습니다. 산위에(시내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오르신후 백성들을 가르쳤던 것처럼, 예수님도 첫번째 가르침이 산위에 오르시고 제자들을 가르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약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모세유형론 (Moses Typology)으로 그리고 있다고 보편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유대공동체였던 마태교회가 취한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입을 열었다는 것은 광야의 시험에서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내용과 연결됩니다. 입을 열어 생명을 전한다는 의미이겠죠, 
 
  3절부터는 유명한 팔복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첫번째 마음이 가난한자, 이것은 다른 번역에서는 심령이 가난한자이네, 여기서 가난하다는 의미는 "프트코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한것으로 "파산을 당했거나", "남의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파산되었다. 그 마음이 어떤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영적인 결핍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천국, 곧 하늘나라를 소유한다고 이야기합니다.
   4절에는 슬퍼하는 자, 곧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인데, 하나님이 이들을 위로한다고 합니다.
  5절에 온유한사람은 복이 있는데 그 복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애통한자에게 하나님의 위로는 큰 복입니다. 세상으로 부터 받을 수 없는 위로를 하나님으로 부터 받는다고 하니 복되고 복된것입니다. 그런데, 온유한자에게 땅을 주신다는 말이 쉽게 와 닿지 않습니다. 온유함이라는 말은 수동적 언어입니다. 스스로 온유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그렇게 인정되어져야 온유함이라는 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말은 누구나 온유하다고 인정될때 온유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것은 "물질"혹은 "영토"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온유함으로 얻게되는 영향력을 의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온유한자의 소문은 멀리 퍼지고, 그의 영향력은 그만큼 알려질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삶이 작은 동네에 머물러도 그의 이름과 그 온유함은 널리 퍼질 수 있습니다.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은 배부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옳은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고픔과 목마름은 의로움 (Righteousness)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차적 욕망의 조건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욕망이 곧 복을 받을 수 있는데, 이 복은 곧 만족 (자족)을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 자비로운 사람에게 복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대하신다고 합니다. 문장 그대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8절에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복이 있는데,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한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세상을 보는 준비된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을 통해 욕망이 출발합니다. 어떻게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욕망의 질이 달라집니다. 흔히 욕망이라는 말이 신앙적으로는 부정적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거룩한 욕망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조건은 마음이 깨끗해야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거룩해야합니다. 
  9절에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평화를 이루는 삶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말그대로 Peacemaker로 이 세상을 살라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온전한 자녀의 삶이 아닙니다. 
  10절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늘 나라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가는한자와 같은 복입니다. 박해를 통한 고통은 말로 할 수 없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옳은일을 하다가 받는 고난이라면 고마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다는 것으로 그 고난은 가볍게 됩니다. 

  11절은 팔복의 결론입니다. "나를 인하여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비난을 받으며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복은 하늘의 상이 크고, 모든 예언자들 (이들을 마음이 깨끗했던 자들로 이해해도 좋다)도 같은 박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은 고난을 예상한 예수님께서 주시는 백신과도 같습니다. 삶이 고난스러룸은 자연스럽습니다. 세상이 고난스럽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팔복, 곧 여덟가지 주어지는 복은 믿는자들이 누리는 백신이면서 든든한 계약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이어지는 말씀은 이런 복을 받는 자들이 누려야할 삶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첫번째, 소금이 되어야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소금은 농사를 지을 때 사용됩니다. 씨를 뿌리고 싹이 나지 않는 경우 소금을 뿌려서 땅에 자극을 줍니다. 그러면 거짓말같이 싹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특별한 소금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땅바닥에 뿌려진 소금은 어느새 짠기를 잃어버린 흙처럼 변하는데, 그러면 그것을 쓸모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소금은 짜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짠맛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극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소금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환하게 드러내는 빛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등경아래 쳐박혀서 비추는 둥 마는둥 하지말고 당당하게 있을 만한곳에 (내가 사는 삶의 자리, 내가 있어야 하는 그 자리)서 환하게 빛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빛이 되라는 것은 주목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숨겨진것을 드러내게하는 역할임을 명심해야합니다. 빛을 쳐다볼 수 없고, 빛을 통해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빛의 역할에 충실해서 우리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 우리를 통해 전적인 타자를 드러내는 일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16절에 우리들의 빛이 사람에게 비추고, 비로서 그 사람들이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이하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를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 율법의 본질을 드러내고 율법의 정확한 이해를 예수님이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19절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의 완성은 율법자체의 문장을 완성하는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삶의 행위에 주목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기존의 율법의 이해는 그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실천에는 익숙해 있었습니다. (율법주의자, 바리새인들의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스스로가 하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상대를 향한 율법은 문자적인 이중적 삶에 대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절부터는 구체적인 율법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의 해석의 말씀입니다. 특히 23절은 율법의 완성의 의미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것은 보편적인 제사의 형식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속건죄 즉, 죄의 용서를 구하는 제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에는 익숙한데, 실제로 그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데" 정작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면, 예배를 계속 드리지 말고, 그 형제를 찾아가 화목한후에 제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율법주의는 다릅니다. 율법주의는 결국 율법이 우상이 된 경우입니다. 겉으로 모양은 화려하지만, 내용없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셨고 이를 완성하기 위해 말씀을 가르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로 하면, 요란한 기독교인인데, 속은 엉망인 경우를 말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어지는 본문들을 비슷한 관점에서 읽으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삶이 곧 복음의 능력이 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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