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장 : 새생활
골로새교회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교회도 바울이 직접 개척하지 않은 교회였고, 직접 가보지 못한 바울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이 두 교회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언급한것을 봐서는 당시에 바울이 교회에 미친 영향력이 상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소아시아 일곱교회중에 가장 많은 책망을 받았던,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던"교회였습니다. 유난히 라오디게아교회에 냉정하게 바울이 책망한것은 직접 자신이 가보지 않은 상황에서 잘 못했기때문에 지적한것은 아니고, 실제로 물질적 부유함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교만했던 라오디게아 도시의 분위기가 교회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황을 보면, 바울이 왜 직접 가지 못한 안타까움을 오늘 골로새교회에 표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향력 가운데 교회가 든든해지면 좋은데 그러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과 걱정이 함께 녹아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3절)라는 말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들의 삶에 어떤 지식과 물질이 우선순위에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위대함은 감히 지혜와 물질로 저울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사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 이하에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살아가는 것을 강조하면서 더불어 헛된 속임수에 현혹되지 말것을 당부합니다. "지혜"와 "물질"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지만 지나친 의존은 "그리스도 안에"살아가는 삶을 방해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20절 이하는 "그리스도 안에"사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들은 이미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으니,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흔히 하는 오해는 "세상의 것은 완전히 잘못된 악중에 악"으로 이해하는데,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살라는 의미는 복음을 고백하고,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자들이 아직도 자신들의 지식을 우선으로 하는 행위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말이지, 세상이 악하니 다 버리고, 우리끼리 울타리를 치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이유는 여전히 세상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온전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행위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세상은 악하니 다 버려라 하는 행위는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바울의 요청은 주님의 주시는 은혜를 맛보는 것은 지금 내 삶에 주어진 현실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안에서 이 모든것을 누리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모습은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직접 자신이 만나지 못해서 벌어진,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간단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실천하면 이전의 삶도 주님안에서 정리될 수 있다는게 바울의 입장입니다. 그리니 우리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은, 기존의 내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내가 소유한것 또한 주님안에 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새로운 삶입니다. 생각해보기 1. 주님안에 사는 노력을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2. 새로운 삶을 위해 내가 변화해야할 지금 내 삶은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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