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법 산책을 할만한 좋은 날씨가 허락되고 있습니다. 교회 마당을 한바퀴 돌면서, 교회 건물을 전체적으로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옆에서 보니, 믈고기 모양입니다. 앞에 본당에 있는 스테인글라스는 물고기의 입을 상징하고, 교회 입구는 꼬리로 보여집니다. 기독교에서 물고기는 박해시기에 기독교인임을 증명하는 암호처럼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건물은 고래모양 비슷한 걸 봐서는 요나서에 등장하는 큰 물고기 (흔히 고래라고하지만 성경은 큰 물고기입니다.)의 모양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나서에서 등장하는 큰 물고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하고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를 하나님의 명령의 자리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보내는 상징적인 존재로 등장합니다. 물고기 뱃속에 3일을 머물렀던 요나는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가 3일이후에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로 뱉어집니다. 요나의 이야기에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기독교적 메시지가 많습니다. 왜 난데없이 요나서이야기인가 싶으시겠지만, 요나는 물고기 뱃속을 경험한후,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삶에 제한적이었던 인식이 넓혀지는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됩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매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러 이 교회 건물에 들어오는 의미는 우리들의 눈을 더 넓혀서 더 넓은 곳을 향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라보라는 의미를 하나더 추가하게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바울은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음(6절)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디도가 자신에게 온다는 소식에 회복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만큼 바울에게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큰 스트레스였던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고린도라는 무역도시에 자리했습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많은 인종들, 특히 이방인들의 출입이 많았던 곳입니다. 물론 유대인들도 그 자리에 많았겠죠. 잘 세워진 고린도교회에 바울의 적대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바울이 왜 사도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것은 바울이 부름받아 사역하는 그 의미자체에 대한 부정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스스로 사도로 고백한것은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의 의미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사명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편지로 이 모든 것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억울했을 것이고, 이해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야하는 부담 그리고 고린도교회가 이 문제로 분열되고 있다는 문제는 바울로서는 참 힘든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마음을 넓혀서 바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마음을 넓히는 순간 해결됩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좁아지면, 결국 편견과 의심으로 마음을 오염시키겠죠. 그러면 온전히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눈이 가리워집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예배하고, 교회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눈을 넓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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